연구소 뉴스
26 | 너무나 비과학적인 ‘R&D 예산 난장판’ (2024.02.01) | 2024-02-08 16:11:17 | |
새해 과학계에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후폭풍의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각 대학과 연구소에는 20%, 50%, 90% 등 일괄 예산 삭감 공문이 줄지어 도착하고 있다. 정부 약속만 믿고 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중소기업 4000여곳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가 나오고 출연연구기관 통폐합 추진이라는 흉흉한 얘기가 돈다. 70억원 예산이 없어 미국이 제안한 유인 달 탐사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한국 큐브 위성 탑재를 거절했다는 뉴스도 심란함을 더한다. 연구비가 깎여 일자리를 잃거나 심각한 수준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과학자들(특히 박사후 연구원, 비정규직 연구원 등)은 최악의 명절을 맞게 됐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다른 진로를 모색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2024년, 한국 사회는 국가부도 상황이었던 IMF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33년 만의 첫 R&D 예산 삭감이라는 역사적인 해를 지나는 중이다. “정부 지출 대비 R&D 예산 5% 유지”는 2022년 출범 당시 윤석열 정부가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며 내건 국정과제였다. 그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은 우리를 더 빠른 도약과 성장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던 대통령은 꼭 1년 후 광복절에는 “나눠먹기식 R&D 체계를 개편하여 과학기술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돌변했다. 그 1년 사이엔 국가재정전략회의(2023·6·28)의 그 유명한 카르텔 발언이 있었다.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는. 증가안으로 짰던 R&D 예산은 대통령 발언 직후 대폭 삭감됐고, 격론 끝에 4조6000억원(전년 대비 14.7%) 삭감된 금액으로 통과됐다. 정부 총지출 대비 R&D 투자는 지난해 4.9%에서 올해 3.9%로 쪼그라들었다. 석연치 않은 예산 삭감 과정이 과학자들에게 안긴 분노는, 새해 들어 대통령의 잇단 180도 말바꾸기에 “우롱당하고 있다”는 모멸감으로 바뀌어 끓어오르고 있다. 삭감할 때도, 늘리겠다고 할 때도 납득할 만한 ‘과학적인’ 설명은 없었다. 지난 4일 새해 첫 업무보고를 겸해 열린 ‘민생토론회’와 5일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서 윤 대통령은 “재임 중 R&D 예산을 대폭 늘리겠다”고 연이틀 호언했다. 열흘 뒤 반도체 민생토론회에서는 “내년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해 민생을 더 살찌우는 첨단산업이 구축되도록 대통령으로서 약속드린다”고 했다. 도대체 지난해와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싶을 정도다. 과학계의 시선은 냉랭하다. 당장 며칠 후, 다음달이 걱정인 젊은 과학자들, 미래의 꿈이 희미해지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내년 예산 대폭 증액 약속, 몇개 부문만 콕 찍은 장기 개혁 방안은 아무런 희망이 되지 못한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R&D 예산을 하루아침에 삭감한 당사자가 또다시 즉석에서 예산을 늘리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며 “삭감한 예산을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180도로 입장을 휙휙 바꾸면서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금년 예산에 R&D를 조금 줄였는데”라며 별일 아닌 듯 넘어가려는 발언이 과학자들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설명을 위해 수십, 수백 번 실험을 반복하는 사람들로선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설명 없는 태도 돌변 외에도, 앞뒤 안 맞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서슬 퍼런 예산 삭감의 칼을 휘두르면서 소리 높였던 ‘이권 카르텔’의 실체를 밝히고, 문제를 해소했느냐는 점이다. 카르텔이 있다면 카르텔을 잡아야지, 예산을 일괄적으로 깎고 연구를 못하게 하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R&D 집중 대상을 찾겠다는 것도 불과 몇주 전이다. 일단 예산부터 깎고, 연구 집중 대상을 찾겠다니 이런 주먹구구가 없다. 전체 R&D 예산은 뭉텅 잘라놓고, 글로벌 R&D 예산을 3배 이상 늘린 이유도 두루뭉술하다. 전문가들은 “기술 이전이 없다면 외화 낭비”라며 실효성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특정 분야를 ‘3대 미래기술’이라며 집중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건강한 학술생태계를 위해선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라는 상식에 비춰 우려스럽다. 종잡을 수 없는 우왕좌왕 정책, 고무줄 예산이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이래 놓고 최근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과학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기억됐으면 한다”고 했단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지켜보는 시민들의 황당함과 분노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